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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발자취

노적봉

노적봉


Mokpo-city nojeok-bong 해발 60m 바위산 노적봉

노적봉(露積峯)은 해발 60m의 바위산에 불과하지만 왜적을 물리친 이순신 장군의 호국혼이 담겨있다.

정유재란 때 12척의 배로 불가능해 보였던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끌고 전열을 재정비 하는 동안 조선의 군사와 군량미는 턱없이 부족하여 바로 왜적이 쳐들어온다면 함락 될 수밖에 없는 위기에 놓여 있었다. 이때의 노적봉은 아주 큰 역할을 하였다. 유달산 앞바다에 왜적의 배가 진을 치고 조선군의 정세를 살피고 있을 때 이순신 장군은 노적봉을 이용하여 위장전술을 펼쳤다. 노적봉 바위를 이엉(볏짚)으로 덮어 마치 군량미가 산처럼 많이 보이게 하고 새벽에 바닷물에 백토를 풀어 밥 짓는 쌀뜨물처럼 보이게 하여 왜군들이 군사가 많은 줄 알고 스스로 물러나게 하였다. 이러한 일이 있는 후로 이 봉우리를 노적봉이라 부르게 되었다.

작지만 정복되지 않는 유달산 노적봉

남의 수례 서쪽으로 멀리 가시고
왕자를 북쪽에서 위태한 몸
나라를 근심하는 의로운 신하
장수들은 공로를 세울 때로다.
바다에 맹세하니 용이 느끼고
산에 맹서함에 초목이 아네
이원수 모조리 무찌른다면 내 한 몸 이제 죽다 사양 하리오.

이순신의 시 '진중음'에서 느낀 바다의 용은 고하도가 아닐까? 맹서한 산은 유달산일까? 혼자 우문현답을 생각하며 눈을 들어 보니 우뚝 솟은 바위가 나를 내려다보며 활짝 웃는다.

노적봉 전경사진노적봉 야간 전경사진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수정리 비봉산의 노적봉전설은 삼한 시대에 소문국왕이 적에게 포위를 당해 식량이 떨어지자 짚으로 산봉우리를 덮어서 노적가리처럼 보이게 했다는 내용으로 목포 노적봉과 같다.
경기도 남양주시 덕소 건너편의 노적봉은 임진왜란때 변협이 경기도 고양이에 있는 행주산성에는 임진왜란때 권율이 같은 목적으로 노적봉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 노적봉은 전쟁과 식량난이라는 관계에서 발생한 위장이거니와, 식수난도 식량난에 못지않게 고통스러운 것이므로 적으로 하여금 후퇴를 유도한 설화가 전해진다.
이러한 유형의 설화는 왜적으로부터 국가를 지키려다가 포위를 당해 곤경에 빠진 장군에 대한 존경심과 승리에 대한 열망이 노적처럼 생긴 산봉우리와 연결되어 실제 전쟁과 관계없이 발생하기도 한다. 유리한 조건에서의 승리는 당연한 것이지만 악조건 속에서 지혜로 승리한다는 것이 설화의 소재가 된다.

노적봉 큰바위얼굴

이순신 장군이 호령하고 있는 듯한 모습의 큰바위 얼굴은 맞은편 이순신 장군 동상과 함께 서남해안의 관문인 목포를 수호하고 있다. 노적봉의 기를 받으면 건강에도 좋다고 하여 다산목과 함께 소원을 빌기 위해 찾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높아 새로운 관광명소가 되고 있다.

4.8만세 운동 재현 행사 사진노적봉 큰바위 얼굴 사진




유달산 천자총통

역사와 문화의 공유장 유달산천자총통

천자총통 발포 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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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달산 체험장은 시민과 관광객이 천자총통을 발포하고 의상을 체험할 수 있는 곳으로 역사와 문화를 공유하는 장소이다. 천자총통 체험은 「목포 유달산 체험 프로그램 http://www.skygun.kr/」 또는 목포시청 사이트에서 신청 가능하며, 목포 유달산 체험 프로그램 사이트에는 천자총통에 관련된 다양한 자료와 채험 모습을 볼 수 있다.



천자총통 근접사진

목포천자총통

종목 : 문화재 자료 138호
분류 : 기타
지정일 : 1987.01.15
소재지 전남 목포시 만호동
관리자 : 목포시

가정을묘명천자총통은 이름 그대로 중국 가정(嘉靖) 년간 을묘년(1555)에 만들었다는 명문이 있는 천자총통을 말한다. 조선시대 중기에는 물건을 세거나 순서를 말할 때, 천자문(千字文)의 순서에 따라 천지현황(天地玄黃)으로 그 순서를 표기한 방법에 따라 이 총통이 조선시대 가장 큰 총통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천자총통은 최무선(崔茂宣)이 고려말에 이미 제작하였던 대장군포(大將軍砲)를 발전시킨 것이다. 장군화통(將軍火筒)도 이 천자총통의 전신(前身)이다. 천자총통의 제원에 관한 문헌기록은 ≪융원필비(戎垣必備)≫와 ≪화포식언해(火砲式諺解)≫에 잘 남아 있다.

체험 안내

행사기간 : 주말 및 공휴일, 축제기간 등
행사시간 : 오전 11시~오후 1시 (발사는 12시)
참가비 : 1팀 2만원 (1팀 3,4명 구성)
신청방법 : 사전예약제 (인터넷 접수)

체험 사진


목포의 눈물 노래비

목포의 눈물 노래비

이순신 장군의 동상과 오포대를 뒤로 하고 40m만 올라가면 바윗돌 위에 목포가 낳은 국민가수 이난영(본명 이옥례)의 '목포의 눈물 노래비'가 있다. 노래비에는 사시사철 이난영의 노래를 들을 수 있도록 녹음 장치를 해놓았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의 새악씨 아롱 적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임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님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설움...
깊은 밤 조각달은 흘러가는데 어쩌다 옛 상처가 새로워진다.
못 오는 님이면 이 마음도 보낼 것을 항구에 맺은 절개 목포의 사랑...

일제하 우리 민족 모두의 망향가, 시름가, 진혼곡

종로 거리의 레코드 가게 축음기들은 밤낮없이 '목포의 눈물'을 틀어댔다. 당시 레코드 가게들이 진열장에 써 붙여 놓은 가사 앞에는 노래를 따라 부르며 가사를 외우려는 사람들로 연일 붐빌 정도였다.

'목포의 눈물'은 지금도 널리 애창되고 있으니 실로 새로운 민요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울밑에 선 봉선화'는 가곡으로 당시 우리나라를 상징하였고, '목포의 눈물'은 유행가로 나라 잃은 슬픔을 달래는 노랫말이 되었다. 유달산 기슭에 세워진 이 비는 1969년 6월 10일 목포악기점을 하는 박오주(朴午周)씨가 기증하여 세워졌는데 이 노래비는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가요 노래비로서 더욱 의미가 있다. '목포의 눈물'은 그래서 목포시민들에게는 흘러가는 단순한 유행가가 아닌 것이다.


노래탄생배경

1934년 조선일보에서 전국 6대 도시를 대상으로 한 향토노래 공모를 했다. 이 때 목포에서 응모한 문일석(본명 윤재희)의 <목포의 노래>라는 작품이 전국 신민요가사 현상공모 당선작으로 선정되자 당대의 유명한 손목인 씨의 작곡을 거쳐 <목포의 눈물> 이라는 노래로 탄생한 것이다. 이 노래는 1935년에 발표되어 일제 수탈의 서러움으로 응어리진 2천만 온 겨레의 심금을 울림으로써 가수 이난영을 전 국민적인 불멸의 가수로 기억되게 하였다.




오포대

정오를 알려준 오포대 Mokpo-city Opo-dae

오포대는 유달산 입구 이충무공 동산 남쪽에 있다. 오포대의 설치는 1909년4월이며 시민들에게 정오를 알리기 위한 포대였다. 조선식 선입포로 현종 10년(1669)에 제작되었다. 높이5자, 구경3치5푼, 선단경7치5푼, 기부8치, 중량733근이며 1회 발사하는데 화약 30량이 소요되었다한다.
조선식 선입포로 현종 10년(1669)에 제작되었다. 높이5자, 구경3치5푼, 선단경7치5푼, 기부8치, 중량733근이며 1회 발사하는데 화약 30량이 소요되었다한다.


대학루 옆 암반 위에 놓여 있는 오포대(지방문화재 제138호)는 정오를 알릴 때 발표하여 일종의 신호로 사용되었다. 삼사십년 전에만해도 목포 부청에 오포대를 관리하는 직원이 있었는데, 정오가 되면 오포대에 올라가서 포구에 화약과 신문지, 휴지 등을 넣고 불을 붙였다고 한다. 펑하는 엄청난 굉음과 함께 휴지조각들이 상공으로 흩어지는 광경이 볼만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이 대포를 발사하는 광경을 구경하러 모여드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오포대

상세정보

도지정문화재,지방문화재자료제138호
지정일자 : 1986년 11월 8일
소재지 :목포시 온금동 산1번지



목포근대역사관

근대건축기법을 살펴볼 수 있는 목포근대역사관

우리에게 지난 세기는 격동과 파란의 시기였고, 슬픔과 기쁨이 무수히 교차했던 혼란스러운 시간이었다.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속에서, 사람은 물론 도시들도 갑자기 부상하고 쇠퇴하곤 했다. 항도 목포의 110년 전 모습은 과연 어떠했을까. 목포근대역사관에 그 해답이 있다.
목포근대역사관은 근세 서양건축의 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는데, 한국 역사의 자각의식을 불러 일으키는 일제 침략의 실증적 유적으로 현재 남아있는 2곳의 동양척식주식회사 중 한곳으로 부산의 동척에 비해 규모면에서 앞선다. 또한 건축사적인 측면에서도 근대 건축기법의 연구에 많은 도움을 주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일제의 식민정책의 선봉기관, 조선농민 수탈기관으로서 일제 식민지 지배정책의 첨병이었고, 특히 동척 목포지점은 그 가운데에서도 사리원 지점과 함께 가장 중요했던 지점이었다.

남한지역의 지점들은 현재까지 확인 결과로는 동척 지점 건물이 남아있는 곳은 목포 외에도 부산밖에 없고, 부산 건물의 규모는 목포보다 작다. 부산의 동척 지점 건물은 그동안 미문화원에서 사용하다가 반환되어 부산시에서 이를 박물관으로 만드는 방안을 논의중이라는 점을 비추어 볼 때 동척 목포지점이 지니는 의미는 매우 크다.

따라서 동척 목포지점 건물은 일제 강점기하 대표적 수탈기관으로 역사성과 시대성이 있고, 지금까지 지정된 문화재 가운데 동척건물이 없다는 점, 그리고 남아있는 부산의 동척건물보다 규모가 크다는 점, 또한 1920년경의 공공시설물로서는 이 지역에서 유일하게 남아있고 일본 제국주의 사상이 근대 건축물에 상징적으로 표출된 유구로서 교육공간으로 활용할 가치가 있다.


상세정보

구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植株式會社)목포지점(1921년 건립)
도지정문화재, 지방기념물 제174호
지정일자 : 1999년 11월 20일
부지 : 1447.9㎡(438평)
건평 : 1층 79.9평, 2층 79.7평, 계 159.4평
구조 : 석조2층
건축양식 : 서구식(르네상스)
소재지 : 목포시 중앙동 2가 6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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